Four Thousand Weeks by Oliver Burkeman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에 진심인 사람은 가용한 시간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쉴 틈 없이 애를 쓰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효율 추구 자체가 비효율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수신함의 메일을 모두 처리하였으나 이내 다시 메일함이 차는 것을 보며 느꼈던 허망함 같은 것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면서까지 메일함을 다 비워냈다 한들 메일, 즉 일거리는 다시 차게 마련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다가 번아웃 되기 쉽죠.
더욱이 우리가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정말 의미가 있는가 라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성공을 이루는 것이 아이와 노는 것이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차 한잔 음미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을까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는 후자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여지도 많습니다.
효율적 시간 사용에 몰두할수록 현재를 잃고 언제 가닿을지 모르는 미래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됨으로써 평안함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불안이 지배적인 그런 삶을 살기 쉽습니다. 시간 사용을 통제하고 지속적인 성취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려 하는 것은 그만큼 불안이 크다는 말의 다름 아닙니다. 과도한 효율성 집착은 더 큰 불안으로 이어지겠고요. 개미의 인내와 끈기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생산성 강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밤낮 없이 근면하게 일하는 개미는 어떤 마음일까요?
물론 저자 또한 한 때 생산성 덕후였던지라 극단적인 게으름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삶을 직선적인 과정으로 바라보지 말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분투하는 시기와 쉼의 시기를 적절히 안배하며 순환적인 과정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일과 삶의 전략적인 불균형을 추구합니다. 효율을 추구하지 말고 비효율을 추구하며 현재를 음미하는 시기도 필요함을 논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죽는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를 인용하면서 말이죠. 이 책의 제목처럼, 80세까지 산다고 할 때 대개 4000주 정도를 살게 되는 것인데,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언제 올지도 모를 미래의 성취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며 강박적인 시간 효율성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합당한가 묻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삶 역시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통제감을 준다는 것이죠.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열정이 없으면 일중독자가 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0주의 거의 절반을 산 저로서는 저자의 얘기가 반향이 크네요. 천년만년 살 것처럼 무수한 선택지를 고려하며 최대한 많은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 한두 가지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헌신하고, 그조차도 일(성취)보다 삶(현존)을 우선시하는 시기를 정해 긴장의 끈을 놓고 순간에 머물 필요가 있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이를 위한 몇 가지 팁이 제시돼 있는데, 때로는 의식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조언이 현실적입니다. 시간에 대한 도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물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유용한 방법입니다.